정두언 의원의 파란만장했던 삶

방금 뉴스 속보에 '미스터 쓴소리'라 불리던 정두언 의원이 사망 소식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받았을 것이다. 새누리당 소속이면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하 이명박)의 비리를 폭로하며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보수논객 정두언 전 의원님의 명복을 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돌아보는 포스팅을 올리며 고 정두언 의원님을 기린다. 

 

고 정두언 의원 (1957-2019)

 

1957년 3월 6일 서울에서 4남 1녀 중 넷째아들로 태어난 정두언 의원은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우울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렵고 불우한 가정환경이었지만 명석한 두뇌와 노력으로 서울대학교 무역학과에 진학했고, 재학 중 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 

 

행정고시를 합격하면 주어지는 군복무 특혜인 장교임용을 포기하고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육군병장으로 만기 전역한다. 대학졸업 후 정두언 의원은 행정 사무관시보에 임용됐고 노태우 정무 제2장관 보좌를 시작으로 정무장관실,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을 거친다. 국무총리 비서실에서는 정보 비서관, 공보 비서관, 정무 비서관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사진 출처: 정두언의 두런두런 블로그 (https://doorun.tistory.com/276)

 

그는 2000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한다. 제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서대문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장재식 후보에게 4%차이로 지고 우울증을 겪었다. 직후 국회의원 신분의 이명박이 찾아와 서울특별시장 선거캠프 합류를 권했는데 그 당시 이명박의 컨셉이 시대정신에 부합한다고 판단, 캠프에 합류하여 이명박을 서울시장에 당선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일하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서대문구에서 당선되었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친이계 핵심 멤버로 캠프활동을 할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박근혜)과 최태민에 대한 폭로성 발언을 하여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그후 정두언은 2007년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당시 친이계의 핵심 세력이 3개로 나뉘었는데 이상득, 이재오, 정두언계 였을 정도로 이명박 정권의 실세 대접을 받았었다. 

 

그러나 MB정권 초기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이상득 의원(이명박의 큰형)에게 2008년 총선 불출마를 요구하였고 그 측근들의 권력사유화를 지속적으로 비판한다. 결국 그는 이명박 당선의 1등 공신이었지만 결국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 변방을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는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서대문구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2015년부터 정두언은 의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소신발언을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자기 모순이고, 전략적으로도 큰 실책. 현재 역사 교과서들이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등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국정 교과서라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잘못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 추종자들을 비판하며) 나라가 군정 종식은 됐어도 왕정 종식은 못 했다
(여당의 친박 TK 패권주의에 대해)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확고부동하다. 이들이 당을 주도하니 당이 수도권에 관심이 없고 민심을 알지도 못한다
고관으로 임명돼 부귀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 다시 국회의원으로 ‘임명’돼 그 부귀영화를 이어가겠다는 것
독재가 보수, 친북이 진보인 기괴한 나라

 

우리는 그가 쏟아낸 여러 독설에서 그의 가치관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전 이뤄진 20대 총선에서 다시 서대문구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더불어민주당에게 패하여 낙선 하였다. 낙선 후 그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 후 이뤄진 사석 인터뷰에서,

 

“힘든 일이 한꺼번에 찾아오니까 정말로 힘들더라고. 목을 맸으니까. 지옥 같은 곳을 헤매다가 눈을 떴어. 한동안은 여기가 어딘지 가늠이 안되더라. 내 딴엔 짱짱한 걸 찾는다고 벨트를 썼는데…, 그게 끊어진 거야.”

 

“인간이 본디 욕심덩어리인데, 그 모든 바람이 다 수포로 돌아갈 때,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겠구나’ 생각이 들 때, 삶의 의미도 사라진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의미 없는 존재가 되는 거다. 급성 우울증이 온 거지. 사실 (2016년 총선) 낙선 자체는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었잖나. 친박의 행태와 국정농단으로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으니 (보수당이) 잘 될 리 없었다. 문제는 낙선 뒤였다. 고통에서 피하려면 죽는 수밖에 없으니 자살을 택한 거야. 14층 건물에 불이 나서 불길에 갇힌 사람이 뛰어 내리는 거나 비슷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병원을 찾았다. 그냥 있으면 또다시 스스로 해칠 것 같아서. 생각해보면 진짜 나도 살면서 가지가지 한다 싶다.”

 

“치유하는 삶. 그래서 카운슬링(심리상담)을 배웠다. 인터넷 강의로 올해 초에 자격증도 땄다. 심리 상담사와 분노조절장애 상담사. 앞으로 임상 수련도 할 거다. 칠십 이후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카운슬러를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 카운슬링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도 스스로 카운슬링이 되거든. 나도 치유하고 남도 치유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나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본 사람이 드물지 않나. 그런 만큼 상담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등의 이야기를 한다. 

 

정계은퇴 이후 TV조선의 정치시사프로, 새누리당 탈당, JTBC 뉴스륨 출연, CBS 김현정 뉴스쇼 '월간 정두언' 등에 출연했고, MB의 측근이었던 과거를 접고 저격수 역할을 하며 많은 언론이 그의 입에 주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MB 구속 당시, 모두들 토사구팽 당한 입장이라 속 시원하겠다고 예상하겠지만 복잡한 기분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당하던 그 생중계는 보지 않았었다고 직접 이야기했었다. 

 

그는 정계 은퇴 후 더 빛나던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2019년 7월 16일 짧은 유서를 남긴채 세상을 떠났다. 인터뷰에서 얘기했던 것 처럼 조금 더 세상사람들을 위한 카운슬링 같은 좋은 일들을 하고 가셨으면 좋았을 걸. 많이 아쉽고 공허하기도 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잘못된 행태에 대해 비판하던 '미스터 쓴소리' 정두언 의원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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